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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걸리지 못한 채 창고에 들어간 영화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대로 잊힙니다. 

몇 년 지나면 배우도 달라져 있고, 관객의 취향도 옮겨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뒤늦게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도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내일 개봉하는 '비광'이 딱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좀 다르게 보입니다. 이유를 하나씩 적어보겠습니다.


1. 먼저 숫자 하나

촬영이 끝난 날은 2021년 9월 19일입니다.

개봉일은 2026년 9월 2일. 

그사이 1,809일이 흘렀습니다. 

4년 11개월하고도 보름입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코로나19 여파입니다. 

극장이 얼어붙으면서 개봉이 밀렸고, 밀린 김에 더 밀렸습니다. 

그 이상은 알려진 바가 없어서 저도 여기까지만 적겠습니다.

다만 이 숫자가 이 영화를 보는 방식을 바꿔놓습니다. 

우리는 5년 전에 찍힌 얼굴을 지금 보게 되는 겁니다.


2. 5년 사이, 두 배우가 달라졌습니다

류승룡은 이 영화를 찍은 뒤 '무빙'을 했고,

'파인: 촌뜨기들'을 했고, 얼마 전 '김 부장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특히 김 부장을 보신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무너지는 중년 남자를 연기할 때 이 배우가 어디까지 가는지요. 

그 얼굴을 이미 본 상태에서, 그보다 5년 전의 연기를 만나게 됩니다.

본인은 '무빙' 이후로 아빠 역할이나 우는 역할은 그만하려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시나리오가 좋아서 이 작품을 택했다고 하더군요. 

순서상 '비광'이 먼저 찍힌 작품이니, 

결과적으로는 안 하겠다던 역할을 관객이 뒤늦게 보게 된 셈입니다.

하지원에게는 약 6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입니다.

여기서 묘한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극 중 남미는 한때 최고의 톱스타였다가 생계형 연예인으로 내려앉은 배우입니다. 

배우의 공백기와 배역의 처지가 겹쳐 보입니다.

물론 우연입니다. 

그런데 스크린에서는 그 우연이 꽤 크게 작동할 것 같습니다.


3. 제목이 왜 '비광'일까

화투를 아시는 분이라면 비광이 어떤 패인지 떠오르실 겁니다.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그 아래 우산을 쓴 사람이 서 있는 그림입니다.

론칭 포스터가 정확히 그 구도입니다. 

우산을 쓴 류승룡의 뒷모습 하나로 화투패를 그대로 옮겨놨습니다. 

제목을 그냥 붙인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고편은 하지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아버지 이야기처럼 보이는 영화인데 목소리는 아내 쪽에서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힌트로 읽힙니다.


4. 어떤 이야기인가

세 줄이면 충분합니다.

톱스타 부부 중구와 남미 앞에 중구의 딸 동주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 일로 두 사람은 파경을 맞습니다.

8년 뒤, 사건에 휘말린 동주를 구하기 위해 남은 모든 것을 겁니다.

배우진은 김해숙, 김선영, 김영민이 동주를 지키는 가족으로 붙습니다. 

박명훈이 중구의 오랜 골수팬을, 이주원이 사건을 쫓는 형사를 맡았습니다. 

이 조합이면 가족이 모여 있는 장면의 밀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연출은 '미쓰백'의 이지원 감독입니다.


5.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사 반응이 이미 갈리고 있습니다.

한 매체는 벌여놓은 이야기를 끝내 수습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평했습니다. 

인물과 사건을 여럿 던져놓고 정리가 안 됐다는 지적입니다.

이걸 감추고 기대작이라고만 쓰는 건 별로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 그대로 적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미쓰백'처럼 인물의 상처를 오래 들여다보는 영화가 맞으시는 분, 

류승룡과 하지원의 연기 자체를 보러 가시는 분이라면 값을 합니다.

반대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장르적 쾌감을 기대하신다면 권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이 영화가 하려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참고로 여담이 하나 있습니다. 

극 중 중구가 야구선수 출신이라 창원NC파크에서 촬영했고, 

류승룡이 지난달 창원 경기에서 황중구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습니다. 

5년 전에 찍은 캐릭터로 올해 마운드에 선 셈입니다.



5년을 기다린 영화가 지금 통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영화가 조용히 사라지지 않고 극장에 걸렸다는 것 자체는 반갑습니다.

'비광'은 9월 2일 개봉합니다.

보고 온 뒤에 어느 쪽이었는지 후기로 다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